중앙집권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뒤 어떻게 하면 강력한 국가와 왕권을 만들어 갈 것인가에 집중하여 정책을 펼쳤습니다. 진시황은 여불위를 통해 알게 된 이사라는 정치인을 옆에 두었으며 이사를 적극 신임하여, 많은 정책이 이사를 통해 나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제는 행정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군과 현을 두고 중앙에서 직접 장관을 내려보내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진시황제는 군현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권력을 세습을 완전히 차단하여 지방의 다른 세력이 싹을 틀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수많은 군현이 존재하였지만 진시황이 직접 관리를 뽑을 정도로 철저히 관리되었다고 합니다.
도로망 개설, 도량형 통일, 화폐통일, 문자 통일
시황제는 하나의 나라를 위해서 기존에 있던 작은 단위의 성과 수비벽을 모두 허물고, 수도 센양에서 전국 주요 지역에 이르는 도로망을 개설하였습니다. 시황제는 통일 정책의 하나로 길이, 무게, 부피를 재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반량전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전국 각지에 배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역 간의 물건의 사고파는 기준이 정해서 유통이 활성화되고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당시 나라마다 달랐던 문자를 소전체라는 통일 문자를 만들어 배포하였습니다.
사상 통일, 분서갱유
이러한 노력과 함께, 이사는 진시황에게 사람들의 정신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며 의술, 약, 점, 농업을 제외한, 진의 책이 아닌 모든 서적을 불태울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진시황은 이를 받아 들어 실용 서적들만 남기고 모아서 모두 불태웠습니다. 이른 분서라고 하는데, 이 분서를 어기거나 비난한 학자를 전 지방에 걸쳐 모조리 잡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잡아들인 학자 460명을 함양에서 모두 구덩이에 산채로 파묻기까지 하였습니다. 책을 태우고 학자를 파묻는다는 뜻의 분서갱유는, 이사의 지위에 대한 욕망과 진시황의 강한 나라를 이루고자 한 욕망이 만들어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강한 통일 정책으로 각각의 달랐던 중국의 경제와 문화, 사상까지 하나의 '진'으로 묶이게 되었고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사람들의 인식에 하나의 중국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근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리장성, 아방궁,무덤
진시황제는 나라안의 작은 성벽들은 없앴지만 전체 나라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국시대에 각 나라에서 쌓은 성벽을 이어서 만리장성을 완성했습니다. 만리장성은 흉노족을 막는 방어이자 진의 경계를 표현하고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시황제는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아방궁이라는 황궁을 지었으며, 사후의 자신을 위하여 거대한 무덤을 건설하였습니다. 진시황은 이 능에 지상세계의 모든 것을 담고자 하였으며 천장에는 보석이 별처럼 빛나고 바닥에는 수은으로 만든 강이 흐르게 하였다고 하며, 이 능 하나를 짓는 데에 10만명이 동원되었으며 36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역에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면서 그 당시 사람들은 막중한 노역과 세금을 부담하여야 하였습니다.
진시황의 죽음
그러던 기원전 210년 진시황제는 5번째 지방 순행 길에서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사구라는 지역을 돌던 중 갑자기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강력하게 억제되고 있던 백성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고, 나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군의 싸움은 점차 세력화되었고 나라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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