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부족은 상나라가 은허로 수도를 옮기고 세력을 확장해 나갈 때, 은허에서 멀리 떨어진 항허강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이었다. 주 부족은 처음에 힘이 약했으나 항허강 강의 풍유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점점 세력이 커지자 상은 주의 부족장인 계륵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다음 부족장은 상에 맞서기 위해 서서히 힘을 키워갔다. 한편 상의 마지막 왕인 주는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치를 돌보지 않고 유소의 달기라는 여인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혹여 그에게 충언하는 신하가 나타나면 즉시 죽임을 당하거나 잔인한 형벌로 죽였다. 상나라 백성과 부족장들의 민심은 떠났고 주부족을 이끌던 무왕이 여러 부족의 뜻을 모아 기원전 1066년 군사를 이끌고 상으로 쳐들어 갔고, 무왕은 점과 제사의 나라인 상을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웠다. 주나라 사람들은 상나라와는 달리 인간의 노력에 따라 하늘의 뜻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무왕은 상나라를 연합하여 함께 공격한 부족장들에게 공작 작위를 주고 백성들에게는 상의 왕이 부패하여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왔다고 하며 천명사상을 내세웠다. 무왕은 상나라의 모든 영역에 대해 통치권을 확립하고 반란을 다스렸다. 하지만 주를 세운 지 2년 만에 갑작스레 죽었고 무를 대신하여 어린 성왕이 즉위하였다.
어린 성왕을 대신하여 숙부인 주공이 나라를 다스려다. 이때 까지도 왕자들의 반란 등 작은 반란 들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주공은 이 반란을 모두 진압했다. 또한 수도 호경이 서쪽에 치우쳐 있어 동쪽으로 성을 쌓고 도시를 세웠으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가까운 친척들에게 수도를 보호하도록 하고 신하들에게 제후라는 호칭과 땅을 하사하였으며 이를 국이라고 불렀다. 제후들은 왕을 보고하고 세금을 받치며 봉건제의 틀을 마련하였다. 혈연관계에 기반을 둔 신분질서는 대를 이어 가며 계속되었고 이러한 제도로 왕을 중심으로 한 신분 질서가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민들도 나이 많은 어른을 중심으로 한 씨족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나라에서 주는 토지를 바탕으로 씨족장이 제후들에게 세금을 바치는 구조로 나라의 통치의 기반을 이끌었다.
하지만 약 2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왕실 내부뿐만 아니라 제후국들과의 관계도 형제에서 4촌으로 4촌에서 8촌으로 점차 멀어지며 봉건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의 한왕은 봉건 질서를 다잡기 위해 제후국에게 세금을 무겁게 메기고, 형벌을 강화 하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주변에 강력한 힘을 키운 제후국들이 쳐들어 오면서 주의 왕을 몰아 내였고 한 때 신하 몇몇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등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갔다. 주의 마지막 왕인 유왕은 여인 포사에게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하였으며 원래 태자 의구와 왕후 신후를 내쫗고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 신후는 견융족과 결탁하여 주나라를 공격하였으나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봉화로 장난을 치며 제후들을 농락했던 터라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았고 견웅족에게 잡혀 죽음을 맞이 하였다.
유왕이 죽자 신후는 제후들과 연합하여 의구를 왕에 앉혔다. 귀족들은 평왕으로 추대하고 호경에서 서주를 세웠으나 기원전 771년 워낙 폐허가 되어있던 호경을 버리고 수도를 낙읍으로 옮겼는데 이를 동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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