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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

메소포타미아 문명 (feat.이집트)

by 탐쓸 2022. 5. 5.

페니키아

 

지중해 도시국가들의 나라

기원전 2500년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비옥한 초승달 불리는 지대의 서쪽 끝과 지중해 연안에는 작은 국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올라온 셈족 중 일부는 기름진 땅을 찾아 지중해 연안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곳은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와 연결되어 있으며 긴 해안을 갖추어 배가 드나들기 적합했습니다. 바닷가 항구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도시 국가들이 서로 연맹을 이루었게 되었고 이곳을 페니키아라고 하였습니다.

 

해양 무역의 중심지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으로 한때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히타이트가 해적의 침략을 받아 약해지자 그 틈을 타 기원 1100년 쯤 독립을 이루어 냈고 그 후 무역의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습니다. 나라가 안정을 찾자 사람들은 배를 만들어 영국, 아프리카 등을 돌기도 하고 여러 지중해 지역을 다니며 무역을 위한 식민 도시를 세웠습니다.

 

알파벳의 전파

 페니키아는 여러 지역을 돌며 문자를 전파하였는데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한 쐐기문자는 뜻글자여서 알아야하는 글자 수가 많고 쓰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무역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기원전 1000년쯤, 무역을 하던 사람들은 소리글자 22개로 알파벳 원형을 완성하였고 알파벳은 페니키아가 세운 여러 식민지를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페니키아는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하였지만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해 오면서 복속하게 되었고 쇠퇴기를 맞이 하였습니다.

 

 

 

헤브라이

 

야훼신앙의 나라

 기원전 2000년쯤 일부 떠돌던 셈족은 나일강가에 힉소스 원주민과 협력하여 이집트 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헤브라이 사람들이라 하였는데 힉소스 왕조가 힘을 잃자 이집트 사람들은 헤브라이 사람을 노예로 부렸습니다. 헤브라이 사람들은 오랜 고통 속에서도 유대교(야훼라는 유일신을 믿음, 이슬람교의 영향)를 믿으며 이 고통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집트 왕은 헤브라이족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헤브라이의 한 엄마는 아이를 죽일 수 없어 바구니에 담아 강가에 두었는데 이를 발견한 이집트 공주의 보살핌으로 영웅 모세가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모세는 헤브라이족을 독립케 하였으며, 사람들을 야훼가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후 이집트와의 긴 다툼 끝에 기원전 1020년쯤 헤브라이 왕국을 세웠습니다.

 

헤브라이 왕국의 발전과 쇠퇴

초대 사울 왕의 뒤를 이은 다윗 왕은 가나안 지역을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찌르고 주변을 정복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죽자 기원전 961년 아들인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 솔로몬은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무역으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왕궁을 새로 지었는데, 이 솔로몬 성전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지나치게 세금을 많이 걷었으며 백성들의 노동력 착취가 이어져 이후에  반란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헤브라이 왕국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대 왕국으로 분열하였습니다. 기원전 925년 솔로 왕이 죽자, 나라는 침략과 반란으로 혼란을 격다가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기원전 586년 유대왕국은 신 바빌로니아 제국에 정복되었습니다. 특히 유대 왕국의 헤브라이 인들은 바빌로니아 지역을 강제 이주되었고 포로 생활을 하는 민족적 고난을 격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빌론의 유수라 하는데, 이런 시련들이 그들의 야훼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야훼 신앙은 이후 크리스트교와 이슬람 교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솔로몬 왕과 사비의 여왕을 짜 넣은 카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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