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와 아테네 함대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이루었고 아테네는 전쟁을 계기로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페르시아는 여전히 강대국이었고 그리스 폴리스들은 델로스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테네가 발전해 가자 델로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연합하였고 아테네를 우두머리로 한 델로스 동맹도 힘이 커지면서 페르시아는 에게 해를 점차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테네는 에게해 무역을 차지하였고, 동맹이 관리하는 금고를 아테네로 옮기는 등 아테네의 이권 독차지가 계속되면서 동맹국들의 불만은 쌓여갔지만 아테네는 점점 발전해 나갔습니다.
기원전 460년 페리클레스라는 아테네의 새로운 지도자는 아테네를 더욱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시민 회의를 거쳐 나라를 관리하였고 20세 이상 남자 누구나 추첨을 통해 나라의 관리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직접 민주 정치를 실현하였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민주 정치를 기반으로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고, 누구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듦으로써 시민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줌으로써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인간에 감성과 이성을 중시하여 철학과 예술이 꽃을 피웠고 문학과 건축 등이 발전하였다.
스파르타
아테네와 같은 폴리스로 스파르타는 무역과 상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도리아 인이 주를 이루는 스파르타는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지역에 정착하면서 많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 원주민을 헤일로타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스파르타인들이 가진 땅을 경작하고 대신 나라에 곡식을 바쳤습니다. 이들의 수는 7만 명에 가까웠고 2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스파르타인들 보다 수가 많았기 때문에, 스파르타 사람들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철저하게 나라를 지키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교육을 받고 훈련되었으며, 군사훈련이 주가 되어 늘 전쟁과 반란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나라의 생계를 책임지는 헤일로타이들이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나치게 억압하고 다른 나라와 접촉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습니다. 반면 스파르타 시민들은 헤일로타이의 희생 덕분에 오직 전사가 되는데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훈련된 강력한 힘으로 스파르타는 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폴리스들을 모아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로써 에게해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리스의 지배권을 사이에 두고 점점 더 치열하게 경쟁하였습니다.
기원전 431년 결국 두 나라는 아테네의 이권 확장 계속하였고 불안해 하던 스파르타가 제재하면서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아테네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갔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전쟁이 계속되던 해에 아테네에 흑사병이 돌고 말았습니다. 이 흑사병은 5년이나 이어졌고 전쟁 중 아테네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페리클래스 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아테네에서는 전쟁을 멈추자는 쪽과 전쟁을 계속하자는 쪽으로 나뉘어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아테네는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스파르타 또한 큰 싸움을 치르느라 많은 것을 잃었고 결국 두나라는 기원전 421년에 휴전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407년 아테네는 다시 한번 스파르타를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결국 붕괴되며 스파르타에 졌고 결국 기원전 404년 27년간의 전쟁에서 항복하였습니다.
이렇게 아테네는 에게해의 해상권을 잃고 결국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리스에서는 계속해서 전쟁과 쿠데타가 계속되어 불안한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두 나라 모두 그리스의 지배권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후 또 다른 폴리스 테베가 다른 폴리스들과 스파르타를 공격하면서 일시적으로 그리스를 지배하는 듯하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고 결국 그리스는 북쪽에서 내려온 미케도니아 왕국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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